[Book] 순간의 꽃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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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누구의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
나무들이 나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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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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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들 끝에 앉은 새끼 잠자리
온 세상이 삥 둘러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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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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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자리에서
내가 왔다
궁수자리에서
네가 왔다
우리는 백년손님 이 세상 서성거리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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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골목 오르막길
오순도순
거기
가난한 집의 행복이 정녕 행복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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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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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이렇게 큰 하늘인가
나는 달랑 혼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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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이 있었다
길 물어볼 사람 없어서
소나무 가지 하나
길게 뻗어나간 쪽으로 갔다
찾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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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할 때가 있다
이 세상밖에 없는가
기껏해야
저 세상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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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개펄 지나
아무 말 않고
바다 속
아무 말 않고
아기거북이는 먼 길 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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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살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죽은 붕어의 뜬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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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늙은 거지
마을 한 바퀴 돌다
태평성대 별것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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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건대
매순간 나는 묻혀버렸다
그래서 나는
수많은 무덤이다
그런 것을 여기 나 있다고 뻐겨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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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미워하는 힘 이상으로
사랑하는 힘이 있어야겠다
이 세상과
저 세상에는
사람 살 만한 아침이 있다 저녁이 있다 밤이 있다
호젓이 불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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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가난한 제 집에 있다
무슨 대궐
무슨 부자네 기웃거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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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물에 떠내려가다가
닿은 곳에서
싹 틔우는 땅버들씨앗
이렇게 시작해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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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욕(無慾)만한 탐욕(貪慾) 없습니다
그것말고
강호 제군의
고만고만한 욕망
그것들이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진리입니다
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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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맞는 풀 춤추고
비 맞는 돌 잠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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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왜?
청명한 날
다섯 살짜리의 질문이 바빴다
그런 왜? 없이는
모두 허무인 줄을
그 아이가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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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행렬이
길을 가로질러 가는 것은
결코 이 세상이
사람만의 것이 아님을
오늘도
내일도
또 내일도
조금씩 조금씩 깨닫게 하는 것인지 몰라
햇볕이 숯불처럼 뜨거운 한낮 뻐꾸기 소리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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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누구와 만나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제일 아름답더라
솜구름 널린 하늘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