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어쩌다 한국인

허태균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 또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를 극단적으로 부정하거나 무조건적을 미화하는 것도 어찌 보면 사춘기의 증상이다.
한국인에 대한 불만을 가득 품은 국민들이,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되고 한국에 대한 약간의 부정적인 평가에도 발끈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집단 속의 작은 존재이기보다는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느끼기를 원하고,
주어진 역할이나 원칙보다는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을 따르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자신의 존재감이 인정받아야 하며, 그 존재감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내가 누군지 알아?’를 외치게 된다.
당연히 이런 외침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신감이 없거나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은 사람들에게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자신의 존재감을 타인과의 관계가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서 찾을 수 있게 될 때,
한국 사회의 갑질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선택을 하고도 자신이 무엇을 잃어야 한다거나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군대 내에서 인권이 소홀히 다루어져서 이런 사고들이 일어났다는 논의가 주로 이루어지면서,
매번 내놓는 대책은 병사들의 인권보호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논의가 군대의 특성과 인권에 대한 진정한 고민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또한 개인적인 요인과 환경적 요인은 서로 상호작용하여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다루면 근본적인 문제해결책이 될 수 없는데도 너무 문제를 단순화시켜 접근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탈개인화 현상이 바로 군대가 운영되는 중요한 심리기제 중에 하나인 것이다.
한국 부모들은 자식이 사고 쳐서 학교에 찾아 갈 때, 당연히 사과하러 간다. 무조건 빈다는 생각으로 간다.
근데 문화가 다른 사회에서 이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부모가 시킨 일도 아닌데 부모가 왜 사과를 하나요, 이런 식이었다.
정서를 표현하는 데 있어 ‘너무’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
세월호; 천만다행으로 대부분의 승객이 살았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원인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그냥 작은 실수, 작은 원인에 만족했을 것이다.
=> 큰 일에는 큰 원인, 작은 일에는 작은 원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좌절-공격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세월호 사고는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좌절의 연속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좌절을 경험하게 만든 대상들이 빤히 존재한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2015년 한국 사회가 메르스와 심각한 가뭄으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누군가가 농담 삼아 “옛날에는 역병과 가뭄의 책임이 군주에 있었다”라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비록 농담이었지만 한국 사람의 마음이 아직 그러하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어는 의사 전달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상대방이 내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시스템 또한 가지고 있다.
명품을 소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건의 실용적 가치보다, 그 태도와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남성은 주로 문제중심적 사고와 대화를 하고, 여성은 정서중심적 사고와 대화를 한다.
아내에게는 자신이 지금 슬프다는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
과거에 비해 인간관계가 단기적이고 피상적이 되면서, 관계주의적 한국인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여성 리더의 핵심적 특성은 바로 ‘상호반응적 소통’이다.
혹시 한국인들은 마치 어머니처럼 내가 말 없이 울고만 있어도 뭘 원하는지 아는 그런 따뜻한 대통령을 원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는 사과하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얼마나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냥 마음속으로 열심히 빌기만 하면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행동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녀를 짜증나게 만든다.
불안을 다스리는 착각적 통제감과 자신은 무조건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비현실적 낙관주의
인생의 수많은 일들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운이라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그것을 그냥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내버려두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미래를 실제보다는 긍정적으로 예측하는 자기고양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 비현실적 낙관주의
사회심리학자 다니엘 웨그너는 성취에 관한 인간의 귀인원리,
즉, 뭔가를 성취하고자 할 때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원인을 찾아가는 우리의 심리적 원리를 체계화했다.
‘능력’, ‘노력’, ‘운’, ‘과제의 특성’ 등이 그것이다.
=> 개인이 가장 통제하기 쉬운 것이 ‘노력’이다. 그래서 뭔가를 하지 못했을 때 노력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인들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조차도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지독한 결핍의 경험은 우리의 심리체계에 결여된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냈다.
돈에는 관심도 없고, 성공에도 시큰둥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취업도 하지 않고, 학교도 안 가고,
남들이 안 하는 뭔가를 평생토록 추구하는 한마디로 ‘돌아이’의 천국이 된다(한국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직 결핍의 원리에 지배당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미친놈들에게 처절한 사회적 제재를 가하지만,
성숙의 사회에서는 그들을 내버려두다 못해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리더들은 지난 60년간 죽어라 열심히 일해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이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은 바로 결핍의 원리다. 그럴 수밖에 없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태어나 악착같이 살아서 엄청난 발전을 이뤄낸 산증인이니까.
우리는 한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
포기를 싫어하고 선택을 회피하면서 오히려 선택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래서 모든걸 두루두루 잘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국인의 복합유연성 때문이다.
회사에서 일하느라고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가족의 사랑은 변치 않을 거라 생각한다.
과거의 것을 잃었다는 것보다는 생존과 성공 이외의 가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건 생활이 풍요로워질수록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옛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마 몇 세대가 더 흘러 우리 자손들 중에 생존이나 경쟁, 세속적 성공을 걱정하지 않는 이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돈이나 물질 대신에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를 찾아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아직 한국 사회는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지고 싶은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가 발전하고 교육이 보편화되고 사회적 욕구와 기준이 다양해지면서, 사람들은 원칙과 신뢰, 정의와 같은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그런 가치를 당연히 지키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배웠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어 했다.
원래 선택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이다.
니트족; 상대적으로 어려움 없이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라난 청년들이 취업난에 직면하자 너무 쉽게 포기하고,
무의미한 소소한 재미만을 찾아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쓴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책은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포기하면서 사는지를 보여준다.
더 흥미로운 점은 바로 그 포기한 젊은이들이 결코 불행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은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 스스로 선택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다.
왜? 그게 재미있고 의미 있으니까.
어찌 보면 평범하지만 행복한 소시민의 삶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체계에서는 세속적 성공과 그것을 위한 학업만이 거의 유일한 가치다.
한국 사회에서 축제를 여는 가장 큰 목적은 지역경제 활성화이다.
그래서 한국의 축제에 가보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장사만 하고 있고 오히려 관광객들에게 더 많이 참여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해외의 많은 성공적인 축제에는 그 지역 주민들이 참여한다.
다른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청소년을 채찍이나 심지어 칭찬으로라도 억지로 공부춤을 추게 하지 말자.
이들은 각자 원하는 춤을 췄을 때 가장 재미있어 할 것이고, 미래에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 성공했다고 믿을 것이다.
한국 문화의 특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무언가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불확실성 회피’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그 책이 자신의 책장에 꽂혀 있고,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의 책상이나 테이블 위에 놓인다면,
한국 사회가 자동적으로 정의로워진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이 가진 불확실성 회피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족확장적이며 관계주의적인 특성은 부정부패나 불공정한 행동을 단지 규범이나 법규를 위반한 행동이 아닌,
가족을 배신하고 마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배신한 패륜적 행동으로 인식하게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이처럼 수치화된 객관적인 평가에만 매달리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의 신뢰수준이 낮아서라고 한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왜 이렇게 처벌에 의존할까? 바로 ‘예방적 동기 성향’ 때문이다.
식스팩을 만들기 위해 운동하는 사람은 현재의 자신보다 더 나은 상태를 추구하고 있으므로 보통 향상적 동기 상태라고 볼 수 있고,
반대로 건강을 잃지 않으려고 운동하는 사람은 현재보다 더 나쁜 상태로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예방적 동기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똑같은 일을 해도 더 나아지는지 여부보다는 더 나빠지지 않는지 여부에 더 신경을 쓰고,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잘하는지보다는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더 못하는지를 살펴보고,
똑같은 결과가 나왔더라도 전보다 나빠지지 않았으면 성공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한국 사람들에게 평가는 좋은 결과나 잘난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이 아니라, 나쁜 결과나 못한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이런 사회에서 평가는 적어도 미래와 관련해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 단지 과거를 확인하기 위한, 특히 과거를 처벌하기 위한 평가로서만 존재한다.
이러니 한국 사람들 중 누가 평가를 좋아할 수 있을까?
외국 영화들을 보면, 슈퍼맨이나 람보 같은 영웅들이 적을 싹쓸이하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지만,
우리 영화들은 뒤처지는 낙오자를 돕고 이끌어서 모두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결승점을 통과하는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향상적 동기를 가진 사람은 원하는 보상을 얻었을 때는 기쁨을 느끼고, 얻지 못했을 때는 실망감을 느낀다. 그 과정에서는 기대감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예방적 동기를 가진 사람은 원하는 결과, 즉 나쁜 일을 성공적으로 막았을 때는 안도감을 느끼지만 그 과정에서는 불안감을 느낀다.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정서는 불안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그런 인생의 도전과 과제들을 바로 예방적 동기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 특강 시리즈가 와인 배우기나 영화 감상과 같이 철학, 역사, 문학 등의 한 강좌로 구성되는 경우를 보면 특히 그렇다.
또 다른 문제는 인문학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인식이다.
사실 ‘왜?’라는 간단한 질문은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들에게는 금기시되어왔던 질문이다.
상명하복과 사회적 의무와 규범이 강조되는 수직적 집단주의 문화를 가진 한국 사회에서,
주어진 상황이나 명령, 사회적 규범과 행동애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곧 거부이며 반항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명품은 그것을 소유하는 기쁨과 자부심을 경험하게 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 궁극적 목적인 경험을 잊어버리고, 물건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왜? 물건이 경험을 통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건의 크기, 속도, 무게 등 측정 가능하고 수치화할 수 있는 측면에만 집착해온 한국 기업들이 몰랐거나 무시했던 것은 바로 인간의 ‘경험’이다.
우버 택시; 국민들이 원했던 것은 기사가 있는, 문을 열어주는, 택시 티가 전혀 나지 않는, 간지나는 고급자가용 서비스였는데, 그런 욕구를 꼭 외제차로 채워야 한다는 물건의 착각에서 또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삶은 과거보다도 더 삭막한 것 같다.
그들의 경험은 책, 학원, 공부, 시험, 경쟁, 이런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의 교육에서 제일 부족한 것이 바로, 왜 취업을 해야 하고, 왜 공부를 해야 하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성찰과 자신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